예전 WoW를 보면 언제나 사람이 복작복작하게 있는 공간들이 있었다.
오리지널 시절 오그리마 앞마당, 불타는 성전 시절 샤트라스의 아달 앞, 리치왕의 분노 시절 달라란 우물이 그랬다.
굳이 목적이나 퀘스트가 없어도 사람이 모여 있으니 괜히 구경하게 되고, 길드원이나 아는 사람을 발견하면 다가가 감정표현을 하곤 했다.
특별한 목적 없이도 이렇게 사람이 모여드는 이유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패턴 랭귀지(A Pattern Language)』에선 이런 공간을 활동의 결절점(Activity Nodes)*과 산책로(Promenade)**로 정의한다.
공원이나 광장, 산책로가 대표적인데, 이런 공간에서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구경하고, 반대로 낯선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게임에서는 내가 희귀한 탈것이나 무기를 얻었을 때, 이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돌아다니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유저가 뭘 들고 있는지 보기 위해 광장을 탐색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MMORPG가 ‘다른 유저들과 함께 게임을 하고 싶어서’ 택하는 장르인 만큼,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
하지만 요즘 MMORPG에선 이런 장소가 잘 보이지 않는다.
트렌드 자체가 커뮤니티 위주에서 목적 지향적으로 변해가는 탓도 있겠지만, 여러 편의성과 발전된 시스템들이 이러한 변화를 가속시킨다.
예를 들어, 많은 게임이 경매장이나 우편함 등의 시설을 NPC가 있는 장소에서 직접 이용하지 않아도 되도록, 편의성이라는 이유로 UI 버튼 하나로 접근 가능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BM 모델의 일부로 이런 편의를 팔기도 한다.
또, 하우징 시스템이 발달해 자신의 영지에서 대부분의 작업을 해결할 수 있게 되면서, 유저들은 강화나 퀘스트가 끝나는 즉시 영지로 돌아간다.
그 결과, 대도시를 돌아다니다가 낯선 사람과 스치고, 또 희귀한 무기나 코디를 자랑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풍경을 보기 어려워졌다.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기 위해 게임을 한다'는 MMO의 기본 전제가 점차 흐릿해지는 느낌이다.
물론 유저 스스로도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줄여가는 면이 있지만, 게임사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환경을 점점 줄여가는 것도 문제이다.
광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과거 게임에 있던 그 공간들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그리마나 달라란을 지도로 보면, 도시공학적인 측면에서 공통된 요소가 보인다.
주요 시설이 모이는 지점에 적당한 크기의 공터가 자리하고, 그곳은 너무 작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넓지도 않다.
(달라란 정중앙은 얼핏 보면 그런 의도 같지만, 실제 플레이 시에는 너무 좁아 제대로 된 ‘광장’ 역할을 하지 못했다).
과거 게임들이 가진 광장의 구조를 도시공학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광장이 만들어지는 조건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수 있다.
- 게임 초반에 한 번쯤은 꼭 지나치는 지역이어야 한다.
- 여러 편의 시설이 교차하는 지점에 적당한 공터를 만든다.
- 상징적인 구조물을 두되, 그 구조물이 별다른 기능을 갖지 않도록 한다.
- 이벤트가 가끔씩 열려 너무 변화가 없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
결국, MMORPG에는 아무 목적 없이도 발길이 가고, 잠깐 머무르며 다른 사람들과 시시한 대화를 나누거나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갈수록 MMORPG가 그 고유의 매력을 잃어가는 지금, 커뮤니티적 특징을 유지하기 위해 광장을 되살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게임에서 이벤트나 시스템으로 강제적인 소통 자리를 마련한다고 해서, 유저들이 곧바로 원하는 커뮤니케이션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인위적인 시도는 반발을 부르거나, 예기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게임사가 해야 할 일은 유저를 강제로 몰아넣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 하나하나가 결국 게임의 커뮤니티를 살리고, MMO라는 장르가 지향하는 ‘함께하는 재미’를 완성해 줄 것이다.
*) https://www.iwritewordsgood.com/apl/patterns/apl030.htm
**) https://www.iwritewordsgood.com/apl/patterns/apl031.htm
사실 이 글은 10년전 썼었던 글을 문장만 다듬어 다시 정리한 내용이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더 심화되는 현상을 보며 환기차 다시 작성해본다.
글의 모티브가 된 '패턴 랭귀지'는 심시티와 심즈를 개발한 윌 라이트가 심즈를 제작할 당시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한 책으로, 관련 전공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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