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세컨드라이프가 있었다.
요즘 들어 메타버스라는 단어를 붙인 플랫폼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게이머들이라면 메타버스라고 말하며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플랫폼들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는데, 자세히 보면 기존 온라인 게임들에서 게임적인 부분을 제거하여 가져온 것을 새로운 기술처럼 포장한 것처럼 보일뿐이다.
P2E와 같이 메타버스는 기존에 있던 개념이 재조명되는 사례인데, 코로나라는 명확한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이해되는 유행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범람하는 플랫폼들을 보면 정의가 너무 남용되어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지 않았나 싶다.
그래픽 부분에서 변화가 있지만 현재 메타버스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컨텐츠는 여전히 '세컨드라이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려 19년 전 출시된 세컨드라이프는 가상세계에서 아바타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현실의 기업들을 볼 수 있는 점이나 경제활동도 가능한 부분에서 지금의 메타버스와 상당히 비슷하다. (사실 액티브월즈가 더 빠르게 개념을 제시했지만, 세계적 트렌드가 된 건 세컨드라이프였다.)
아이디어 자체는 혁신적이었으나 다소 시기상조라고 느껴졌던 부분이 있었는데, 초창기 세컨드라이프를 해봤을 당시 현실에도 존재하는 학교들이나 기업이 보는 신선함은 있었으나 플레이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부족했다. (외국어의 한계 역시 있었다.)
실제로도 사회적으로 많은 이목을 끌었지만, 해야 하는 필요성을 설명하지 못해 결국 사장되고 말았다.
유행이 도는 것처럼 메타버스는 다시 떠오르는 기술이 되었지만, 여전히 메타버스는 그 시절에서 발전한 부분이 거의 없다.
필수 조건
메타버스를 발전시기기 위해선 정의를 명확하게 정하고, 뒤따르는 필요조건들도 정해야 할 것이다.
가장 폭넓게 생각했을 때의 메타버스의 정의는 '현실과 연결되는 가상 세계' 일 것이다.
여기서 이어지는 필수조건은 '가상 세계'와 '타인과 상호작용'이다.
'가상 세계'라는 조건은 언뜻 당연해 보이지만 여기서 연결되는 주요 개념은 아바타의 사용이다. 아바타를 통한 익명성은 그 자체가 메타버스를 이용할 하나의 이유가 수도 있으며, 다양한 페르소나를 사용하는 건 메타버스 속 하나의 콘텐츠로 이용될 수 있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은 얼만큼의 상호작용이 가능한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단순히 대화만 하는 수준이라면 SNS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앞서 설명한 아바타를 통한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행동이나 감정 등을 좀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단들이 필요하다.
타인 역시 개인만이 아닌 기업과도 같은 집단을 포함한다. 세컨드라이프때도 시도되었지만 현실 속 다양한 기업들이 참여하여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메타버스에서 동일하게 제공하는 것은 기업과 개인 양측에게 의미가 있다.
사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위 조건만으로는 메타버스를 말하기에 부족하다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메타버스의 정의는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가상 세계'인데, 이를 만족하려면 최소 조건 역시 더 엄격해야 한다.
먼저 '현실 차단'의 필요성이다.
메타버스는 말 그대로 현실을 대체하는 또 하나의 세계이다. 가상세계에 대한 애매한 진입은 쉬운 이탈을 불러올 것이다.
사람은 동시에 두 곳 이상에 감각을 분산하기 어렵다. 일상이나 게임에서 집중이 필요한 순간에 찾아오는 몰입 상태(flow)를 생각해보자.
무언가에 몰입하기 위해선 주변 상황을 완전히 배제한 체 내가 하고 있는 것에만 모든 감각을 집중해야 한다.
현재의 메타버스들을 생각해보자. 모든 감각은 현실을 향해있고 화면 크기만큼의 시각과 청각만이 메타버스 세계에 존재하게 된다.
오감 중 시각과 청각만이, 그것도 일부만이 가상 세계에 향해있을 뿐인데 그 세계에 들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재 기술로는 모든 감각을 대체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시각/청각은 어느 정도 대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오로지 가상세계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단순히 작은 화면을 통해 접근하는 것은 메타버스라고 부르기 어렵다.
다른 조건으로는 '지속 가능한 콘텐츠'이다. 세컨드라이프의 실패를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메타버스에 들어가는 건 피곤한 작업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기를 이용하여 접속하여야 되고, 그동안 다른 작업에 집중하기 어렵다.
게임의 경우엔 '재미'라는 이유가 있기에 들어가지만 메타버스의 경우에는? 다양한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어도 들어갈 동기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점점 사장될 수밖에 없다.
페이스북에서 메타로..
현재로선 위와 같은 조건들을 만족하는 수단은 VR이다.
지난 2월, 최초의 TCG인 매직 더 게더링은 최근 일본을 배경으로 한 카미가와 블록이 나오면서 애니메이션 PV 등을 게시하는 등 다양한 홍보를 하고 있다. 그중 하나로 VR 전시관을 개최하였는데, 카미가와를 소재로 한 맵에 전시된 게임 일러스트들을 구경하는 건 실제 전시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작년 도쿄 게임쇼 역시 같은 에셋을 사용하여 VR에서 진행되었는데, 다양한 게임사에서 부스 형태로 만든 맵을 돌아다니며 게임 트레일러를 구경하는 느낌은 신선했다.
두 콘텐츠를 모두 체험하며 느낀 건 VR을 통한 전시회가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4~5년 전 친구의 VR 기기를 빌려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경험 자체는 신선했지만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강했었다.
무거운 기기, 불편한 유선, 부족한 콘텐츠 등으로 인해 한번쯤 해보면 좋은 경험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2020년 페이스북에선 오큘러스 퀘스트를 출시하였다. 제품 소개가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출시 당시 바로 구매를 했었는데, 처음 사용하며 느낀 건 해당 기기로 인해 VR시장이 크게 바뀔 거라 예상했다.
완전한 무선과 PC에 종속되지 않는 점 여기에 기존 VR의 절반 정도의 가격으로 출시된 것은 과연 오큘러스에서 마진이 남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아마 오큘러스에서도 도박에 가까운 느낌이 아니였을까.
사실 VR시장은 기기 보유자가 얼리어답터나 VR 개발자, VR사업자들에 한정되어 있었고, 이런 보급률 속에서 VR 시장은 더 이상 커지기 힘들었다. 수요가 적다 보니 관련 콘텐츠 공급도 적은 편이었고, 이런 현황에서 오큘러스는 다소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VR기기의 보급률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오큘러스의 도박은 성공하였고, 최근 오큘러스 기기 군이 스팀 내 VR 기기 점유율 약 70%를 달성하는 등, 가장 대중적인 VR기기가 되었다.
작년 10월 페이스북이 메타로 사명을 변경한 건 꽤 큰 뉴스였는데, 이는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페이스북 역시 VR이 메타버스의 핵심이 될 거라 예상했고, VR 시장을 잡고 있는 페이스북이 메타버스의 중심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넘어야 할 문제점도 많다. VR은 여전히 무겁고 쓰기 불편하다. VR 멀미도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VR이 현재 메타버스에서 제일 가깝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메타버스가 불러올 미래..
현재 메타버스의 유행은 코로나라는 온실 속에서 키워진 화초와 같다.
비대면 환경에서 서로 같이 있다는 현장감을 느끼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코로나의 종식은 곧 메타버스의 위기가 될 것이다.
특히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환경이 끝난 직후 몇 개월 동안은 그동안의 반동으로 현실에서의 만남이 극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때 메타버스가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지에 따라 이후 메타버스의 흥망이 갈리지 않을까 한다.
메타버스가 지속적으로 흥행하려면, 단순히 현실의 지원품이 아닌 현실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매력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런 부분에서의 장점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초공간)과 현실에선 느끼지 못하는 경험의 제공일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얼마나 잘 재현해내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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