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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무스메 프리티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잡담/Review 2024. 7. 25. 21:49
스포일러 있음.
달리는 말의 네 발이 동시에 지면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있을까. 말은 워낙 빠르기에 사람의 눈으론 분간하기 어려울뿐더러, 입증하기도 어렵다.
1878년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는 말이 달리는 과정을 모두 포착하여 사진에 담아내야 하는 의뢰를 받고, 여러 대의 카메라와 실을 이용해 12개의 사진 속에 말이 달리는 순간순간을 <움직이는 말> 속에 담아내며 말의 다리가 모이는 순간 네 발이 동시에 지면이 떨어지는 걸 입증했다.
이듬해 마이브리지는 영사기의 시초가 되는 주프락시스코프를 만들어내며 현대 영상 시대의 문을 연다.
달리는 말을 정지된 이미지로 담으려던 시도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말을 의인화한 게임 <우마무스메>가 영화화되어 극장에 오른 건 꽤나 의미 있는 순간이다.
<새로운 시대의 문>은 실제 일본 경마에 존재하는 클래식 3관 경기를 기반으로 전개된다.
같은 세대 간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오직 3세 때만 도전 가능한 클래식 경기. 그 중 트리플 크라운이라고 칭해지는 사츠키상, 일본 더비, 국화상은 성장기의 경쟁, 각기 다른 거리, 다른 경기장이라는 조건들이 합쳐져 지금까지 단 8마리만이 삼관마로 존재할 정도로 절대적인 강자가 나오기 어렵다.
경기의 양상을 예측하기 어려우며 드라마틱한 전개가 자주 나온다는 특징 때문인지 이미 TVA에서도 여러 차례 주요 내용으로 등장하며, 극장판과 이어지는 내용이면서 불과 작년 공개했던 웹 애니메이션 <Road To The Top> 역시 클래식 3관을 주요 내용으로 다뤘다.
연속적으로 클래식 3관 서사를 다루고 있기에 처음 내용을 보고 느낀 건 우려였다. 세 경쟁자가 3관을 나누어 차지하는 플롯은 뻔한 내용이 돼버릴 수 있기에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나 했는데, <새로운 시대의 문>은 클래식 3관 기반을 유지하며 뻔한 정통 스포츠물의 문법으로 그려낸다.
과감하게도 비슷한 내용을 클래식한 전개로 풀어내는 배경엔 '영화이기에'라는 이유가 숨어있다. 기존의 TVA나 웹 애니메이션은 그래도 <우마무스메> IP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대상이었기에 IP를 잘 모르는 경우에는 보는데 무리가 있다.
<새로운 시대의 문>은 주인공의 성장과 좌절, 슬럼프를 이겨내는 익숙한 서사를 통해 게임이나 실제 경마를 접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받아들일만한 내용으로 전개한다.
이러한 클래식한 전개를 보강하는 건 연출이다. 이전 <Road To The Top>의 레이스 전반을 거의 끊임없이 보여주는 전개와 달리 <새로운 시대의 문>은 게임의 고유기를 떠오르게 하는 연출 등을 자주 삽입한다. 이러한 연출이 레이스 도중 맥을 끊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직후 역동성을 더해가며, 정제되지 않은 거친 선등을 그대로 드러내어 레이스의 긴박감은 하강 없이 유지된다. 이러한 시도는 빠른 속도감에 대한 강조만이 레이스 연출의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레이스만이 아닌 빛을 이용한 연출 역시 탁월하다. 영화 속에서 빛은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한다. 레이스 이후 그늘에 남겨진 패자와 양지로 나온 승자. 타키온의 기자 회견 이후 비상등을 제외하고 사라지는 모든 빛 등 직설적으로 인물들의 심정을 드러내는가 하면. 일본 더비 이후 정글 포켓을 압박하는 카메라 플래시나 여름 합숙 폭죽의 잔광은 은밀하게 극에 스며든다. 영화 속에서 이러한 빛을 가장 잘 받아내는 건 인물이 아닌 정글 포켓이 가지고 다니는 '목걸이'이다. 달리고자 하는 의미, 열망 등을 상징하는 목걸이는 프리즘과 같이 받아낸 빛을 무지갯빛으로 난반사하며 흩뿌린다.
<새로운 시대의 문>의 얼핏 보면 정글 포켓의 성장을 다룬 왕도적 이야기이지만, 이면의 내용은 목걸이에 어떠한 빛이 담기고 어떻게 방출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처음 정글 포켓이 마주하는 빛은 후지 키세키의 달리기에서 보이는 스포트라이트이다. 이후 라이벌에 반응하여 빨라진다는 타키온의 평가처럼 정글 포켓은 라이벌들의 자극에 성장하지만, 이후 그 열정은 타키온의 잔광과 함께 빠르게 소실된다. 슬럼프에 빠진 정글 포켓에게 다시 빛을 불어 넣는 건 후지 키세키와의 병주에서 보이는 스포트라이트이며. 마지막 재팬컵에선 내면 속 벽을 부수며 빛을 방출한다.
목걸이를 가진 다른 인물은 아그네스 타키온이다. 타키온의 목걸이는 그녀가 달릴 때 내면에서 드러나며 반짝이나, 은퇴 선언 이후 타키온은 계속 경기장의 관중석이나 연구실의 그늘 속으로 숨어든다. 타키온의 목걸이가 다시 강조되는 건 정글 포켓이 후지 키세키와의 병합 이후 타키온의 연구실에 방문하는 순간이다. 정글 포켓의 병주 요청에 타키온의 목걸이는 실내로 비추는 빛을 받아 무지갯빛을 발하나, 타키온은 요청을 거절하고 커튼을 치면서 스스로 빛을 차단한다. 이러한 저항이 무의미하게도 타키온은 마지막 재팬컵의 정글 포켓이 방출하는 빛을 받아 경기장의 그늘 밖으로 나아간다.
이전까지 여러 작품에서 우마무스메가 달리고자 하는 이유는 '본능'이란 천부적인 사명으로 묘사되어 왔으나, <새로운 시대의 문>은 우마무스메가 '달리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의문을 던지며 내용을 이끌어간다. 마지막 재팬컵에서 20세기의 패왕인 오페라 오가 21세기의 문을 연 정글 포켓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강한 라이벌을 갈망하던 자가 라이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자에게 건네는 바통 터치이다.
연출이나 서사 모두 이전에 비해 발전한 것이 눈에 띄지만 아쉬움은 남아있었다.
107분의 러닝타임 때문인지 단츠 플레임이나 맨해튼 카페의 이야기는 다소 빈약했다고 느껴졌으며, 영화 전반이 정글 포켓과 타키온의 주 무대처럼 느껴진다.
목걸이를 이용한 프리즘의 연출의 경우 꽤 노골적으로 다가와서 주제를 주입하는 듯 느껴져서 좀 더 덜어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대의 문>이 보여준 가능성은 남다르다. 이전까지의 작품이 IP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헌정 영상이었다면, 이젠 IP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추천해 줄 만한 웰메이드 스포츠 애니메이션의 단계까지 달려 나왔다. 작품의 성장세 역시 작중의 우마무스메와 같이 빠르고, 한계를 모르는 질주를 보여주는듯하다.
작년 <Road To The Top>의 레이스 연출은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라고 생각할 정도로였는데, 직후 <새로운 시대의 문>이 보여준 레이스의 연출은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음을 입증해냈다.
매년 12월을 장식하는 레이스는 그야말로 올스타전이라고 하는 '아리마 기념'과 이듬해부터 클래식 노선을 뛰게 되는 말들의 가능성을 보는 경기인 '호프풀 스테이크스'이다.
<새로운 시대의 문>은 이제 막 호프풀 스테이크스를 뛰며 <우마무스메>의 영상화가 가진 가능성을 증명해냈다.
<우마무스메>의 영상화가 앞으로 풀어내야 할 이야기는 많다. 트리플 티아라와 같은 그간 조명하지 않았던 노선부터 '오구리 캡'과 같은 흥행 보증의 서사도 남아있다.
또 다시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를 다시금 부숴줄 작품을 기다리며, 앞으로의 레이스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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