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Review]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잡담/Review 2019. 1. 16. 01:45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딱 맞는 삶을 살았었다.
국가의 이념에 따라 공산당에 가입했던 그는 2년만에 당에서 추방 당하고, 이후 다시 재가입되나
'프라하의 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추방되며 프랑스로 망명한다.
이러한 사연 떄문인지 그의 작품속엔 '시대정신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이라는 테마가 짙게 깔려있다.
그의 작품인「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네 남녀가 나누는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밀란 쿤데라의 삶을 엿볼수 있다.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밑작업들
이 소설은 가볍게 읽을 수도 있지만 속에 담긴 밀란 쿤데라의 가치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밑작업이 필요하다.
먼저 밀란 쿤데라의 삶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의 아버지 루드비크 쿤데라는 음악학자였으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밀란 쿤데라의 작품 대부분 속에서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볼 수 있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도 음악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6번 악보에 적혀있던 'Muss es sein / Es muss sein' 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키워드이며
소설 중간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63p)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이 외에도 각 챕터의 문체에서 알레그로(Allegro), 아다지오(Adagio)와 같은 템포를 느길수도 있는데, 각 챕터가 연주하는 템포와 내용의 연관성을 생각하며 읽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가진 소설들중 하나인「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봤다면 이 소설을 읽을때 기시감이 들수도 있다.
밀란 쿤데라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이기에 이 소설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 표현 기법 중 하나인 혼성 모방(Pastiche)이 사용했다.
소설의 전체적인 틀은 '안나 카레니나'의 구조에서 차용했으며 소설 속 인물들도 '안나 카레니나'의 등장인물들과 쉽게 연결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호 텍스트성을 직접적으로 알려주듯 소설 속에서 테레자가 키우는 개의 이름은 카레닌이고, 테레자와 토마시를 연결해주는 물건은 「안나 카레니나」이다.
물론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안나 카레니나' 를 읽어봐야 하는 건 아니며,
소설을 이해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봤다면 두 소설을 비교해보며 읽는 것도 좋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인물을 고르자면 니체가 빠질 수 없다.
그의 사상은 그 당시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인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밀란 쿤데라 역시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영원회귀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테마이며, 이 개념을 모르고선 소설을 이해하기 어렵다.
영원회귀는 동양 불교의 윤회사상과도 비슷한데, 차이가 있다면 '완벽한 재현' 이라는 점이다.
영원회귀속에서 우리의 삶의 시작과 끝은 연결돼있으며 우린 완전히 똑같은 삶을 무한히 반복한다.
즉 내가 할 행동들은 수많은 미래의 내가 이미 했었던 행동이며, 내가 하는 행동들은 수많은 과거의 내가 똑같이 따라 할 행동이다.
재미있게도 이 사상은 두 개의 상반된 해석이 존재한다.
먼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삶을 개척하려 해도 이 모든 것이 이미 짜인 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는 허무주의적 해석으로.
결국 우리의 삶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물론 니체가 의도한 바는 이런 허무함이 아니다.
만약 이번 삶이 최초라면? 내가 선택하는 모든 것이 미래의 모든 나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내가 오늘 하루를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면, 무한히 반복되는 삶 속에서 긍정이라는 지표가 남게 된다.
니체가 의도한 영원회귀의 본질은 운명을 사랑하는 것(Amor Fati)이다.
물론 내 행동 하나하나가 영원히 반복된다는것은 엄청난 책임이고, 엄청난 무거움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영원회귀를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표현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프라하의 봄' 역시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요한 키워드이다.
밀란 쿤데라가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 계기이기도 한 '프라하의 봄'은 소설속에서 테레자와 토마시에게도 많은 변화를 준다.의사였던 토마시는 시대적 흐름으로 인해 직업을 잃게 되지만, 동시에 그는 본질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쿤데라는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덫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 인간의 삶이 무엇이냐를 탐구하는 것'(p.319) 이라고 말한다. 시대의 흐름은 개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격류속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쿤데라가 탐구한 삶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만 하다.
무거움과 가벼움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뽑자면 첫 4페이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특히나 첫 부분을 놓치면 쿤데라가 전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소설의 첫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삶은 영원회귀를 받아들이냐 마느냐로 나뉜다.
영원회귀를 받아들인다면 그 무거운 짐까지 떠안게 되지만, 그러한 무거움 속에서 우리의 삶은 진실해지고 소중해진다.
반면 영원회귀가 없는 삶은 그 무게를 견디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이다.
하지만 짐이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너무나 가벼워져, 삶의 행동들이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우린 영원회귀를 받아들인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에 쿤데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양분법을 소개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두 가지로 양분시켰다.
빛과 어둠,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가벼움과 무거움 등으로...
이 양분의 한쪽은 긍정이고 다른 한쪽은 부정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양분법에 의해 무거움은 부정이 되고, 가벼움은 긍정이 된다.
영원회귀는 무거움이 인생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준다 말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무거움을 끔찍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까?
존재의 가벼움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무거움을 택할 것인가.
소설 속 네 인물은 각각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움직이며 이 질문에 대한 다양한 대답을 제시한다.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그려내는 이야기들
‘einmal ist keinmal(한 번은 없었던 것과 같다).’ 인생의 일회성을 상징하는 격언에서 탄생한 토마시는
가벼움의 극점인 사비나와 통할 정도로 삶의 가벼움을 잘 이해하며 가벼움의 세계에 있길 희망한다.
하지만 운명적 이끌림에 의해 테레자를 만나 서서히 무거움의 세계로 이동한다.
작품 속에서 토마시의 직업은 의사에서 유리창 닦이로, 유리창 닦이에서 농촌의 트럭 운전사가 된다.
이러한 직업의 이동은 그가 무거움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과 일치한다.
처음 그가 쓴 글로 문제가 생겼고, 이를 회피할 수 있었지만 그는 테레자를 위해 희생을 선택한다.
그는 희생의 대가로 유리창 닦이로 전락한다.
이로인해 그의 영혼은 무거움의 세계에 진입했지만, 여전히 그의 육체는 가벼움의 세계의 머물러있다.
이것을 눈치 챈 테레자는 토마시를 한 번 더 무거움의 세계로 이끌며, 그의 육체마저 무거움의 세계로 이동시킨다.
소설 마지막부에서 돈 후안에서 트리스탄으로 변해버린 토마시는 테레자의 꿈에서 보여주듯이 더 이상 힘이 없는 토끼처럼 보인다.
이러한 토마시의 변화를 보면 여전히 무거움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하지만 토마시를 무거움의 세계로 이끌어서 미안하다는 테레자의 사과에 대한 토마시의 대답은 독자의 상상과는 자뭇 상반된다.
자신은 이러한 삶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대답.
그리고 둘의 사후 사비나에게 전해진 편지에서 알려지는 행복한 최후는 무거움의 부정성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킨다.
재밌게도 테레자의 강아지였던 카레닌은 단순히 애완동물로서의 소모되지 않고 마지막 장에서 존재 의의를 강하게 드러낸다.
테레자는 인간이 반복적 삶을 부정적으로 느끼는 이유가 오직 인간만이 천국에서 추방되며 육체와 영혼이 이원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을 다시 원형적 삶의 긍정성으로 이끄는 존재가 동물이라고 이야기하며, 원형적 삶을 사는 카레닌의 존재를 격상시키며 삶의 무거움을 긍정화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삶의 무거움이란 더 이상 부정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반대로 가벼움의 정점에 위치한 사비나는 일평생 ‘키치’라는 개념을 부정하며, 자신의 가벼움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신하는 삶을 산다.
이러한 자신의 선택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비나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죽음에 대한 편지를 받는다.
가벼움을 버리고 무거움을 선택한 토마시가 행복 속에 삶을 마감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배신 끝에 남는 것이 결국 공허라는 걸 깨닫는다.
사비나는 그 순간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이 부분을 기점으로 삶의 무거움이 부정성을 유지하지 못한것처럼. 가벼움은 더 이상 긍정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무거움에서 가벼움의 세계로 이동했던 프란츠는 처음엔 가벼움의 긍정성을 만끽한다.
그러나 마지막엔 마리클로드에 의해 강제로 무거움의 세계로 끌어내려지며, 무거움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결국 가벼움의 끝은 비극이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파르메니데스에 의해 규정되었던 무거움의 부정성과 가벼움의 긍정성은 소설 마지막에 이르러 중립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반어적 개념인 줄만 알았던 무거움과 가벼움은 유의적 개념으로 변화하며, 삶에서 묵직함과 가벼움 중 어떠한 방향을 택해야 하냐는 질문은 그 가치를 상실한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움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소설 첫 부분에 제시된 문장처럼 우리의 삶은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언제나 평평하다고 인지하는 행성이 사실은 구형이듯이, 영원회귀의 삶을 살아간다 해도 사람은 그 속에서 직선적 시간을 느끼며 살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무거움의 세계에 있던 테레자와 토마시의 최후에서 그들이 느낀 건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이였다.
무거움 속 가벼움.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적 조화야말로 삶을 가장 잘 드러낸다.
‘슬픔은 형식이요 행복은 내용이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잡담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view]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0) 2022.05.08 [Review]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My Tomorrow, Your Yesterday, 2016) (0) 2019.02.02 [Review] 컨택트(Arrival, 2016) (0) 2018.02.01 [Review]버드맨(Birdman , 2014) (0) 2018.01.29 [Review]위대한 쇼맨(The Greatest Showman, 2017) (0) 2018.01.09